김병연 시인/수필가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뉴스도, 새롭게 밝혀지는 비리도 이제는 무덤덤하다. 일말의 기대감마저 무너져버린 상황에서 모든 것들이 무감각해졌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끝은 어디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한 꺼풀씩 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예기치 못했던 또 다른 껍질이 튀어 나오니 어느 막장 드라마가 이만할까 싶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이번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준 권력을 대통령이 아닌 평범한 아줌마가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이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어찌해서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안녕에 쓰이지 않고 최순실과 그 측근들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사용됐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최순실과 그 측근들이 떡 주무르듯 국정을 농단하고 국기를 문란케 한 작금의 사태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능력한 꼭두각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다는 뒤늦은 후회와 자괴감도 함께하고 있다.

광화문 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일렁인 232만 개의 촛불 바다는 국정농단의 원인자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잘못된 선택을 한 국민 자신에 대한 채찍이기도 하다. 몇몇의 손에 국격이 침몰한 수치스러운 현실을 차분하고 성숙되게 축제로 승화시켰지만, 손에 들려진 촛불과 거대한 함성에는 응어리와 울분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232만 명이 쏟아내는 분노의 함성은 호랑이나 사자의 포효보다 더 컸고 송곳보다도 더 날카롭게 온 국민의 폐부를 찔렀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원인자들의 작태에 국민들은 더욱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다. 국민들의 요구는 단순 명료하다.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해 국가를 위기 상황에 빠뜨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깨끗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떠넘기거나 꼼수를 동원해 반전을 꾀하려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선의의 행위라는 그럴듯한 말로 비위를 포장한 채 국정운영의 잘못과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대통령은 짜증만 더하게 한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기성세대는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미래의 주역인 아들딸들에게는 정의롭고 깨끗하게 살라고 가르쳐야 하는 표리부동한 현실이 부끄러워서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민주시민이 돼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은 법과 질서를 유린하는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정부패와 뇌물과 청탁이 없는 청렴한 사회를 꿈꿔 온 아이들은 대통령의 비호 아래 뇌물과 청탁이 오가고 협잡이 난무하는 무법적인 사회를 납득할 수 없다.

잘못을 했다면 인정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쓰러져가는 권력을 부여잡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미래의 주역들이 후일 똑같은 행동을 했을 때 어찌 탓해야 할지 어른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보고 배운 것이 법질서 무시요, 부정부패요, 책임회피이니 말이다.

책임질 줄 아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다. 국회가 오는 9일 탄핵안을 처리할 예정이지만, 이미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탄핵됐다. 4%의 대통령 지지율과 232만 개의 촛불은 민심이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음을 보여주는 확증이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며칠 전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물러나면서 던진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 백성이 신뢰하지 않으면 정부는 존립할 수 없다)의 의미를 이제라도 되새겨 보고 또 되새겨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강력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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